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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당시 나는 철거가 예정된 재개발 아파트 단지를 찾아 기록 사진을 진행 중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건물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한국의 풍경들 속에 대규모 철거단지 속 각각의 칸막이로 나뉘어진 텅 빈 방안에 가만히 서있다 보면 지난 날 그 공간에 머물렀던 기억들과 조우하게 된다.

10월 20일, 나는 강서구 염창동 우성 아파트 다동 지역 일대를 촬영하며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박스를 발견하게 된다. 그 박스 속에는 몇 권의 책과 함께 쓰다만 종이와 신문 조각들 그리고 자신을 K라 주장하는 한 익명의 편지가 있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나는 K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그냥 김씨라고 부른다. 이러한 호칭이 맘에 들진 않는다. 난 분명한 이름을 갖고 있다. (중략) 하지만 지금 나는 외롭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숨죽이며 살고 있다. 방 안의 천장이 언제나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다.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 나는 세상을 증오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일반 규칙과 규범을 철저하게 어길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겠지만 내 신념은 변함이 없다. 역겹다. 짐승이 울부짖던 시절 그들은 동지였지만 이제는 개돼지만도 못한 짐승이 되어버렸다. 난 내 능력을 값지게 쓸 것이다. (중략)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신문은 진실이라 생각하면서 이웃집에 사는 나의 말은 귓가로 흘려버린다. 난 정말 화가 난다. 하나님께 기도 드린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날 꺼내달라고. 그들이 날 감시한다고 울고 또 울었다. (중략) 가끔씩 두렵다. 나의 마음이 두렵다. 사람을 증오하는 마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잊을까봐 두렵다. 나는 확인하고 싶다. 사람들을 확인하고 싶다. (중략) 어제 밤 그녀는 나를 거부했다. 너무나 어리석은 여자였다. 난 그녀를 진심으로 너무나 사랑으로 대했는데 그녀는 나를 거부하고 도망치려고만 했다. (중략) 결과적으로 그녀는 내가 죽인 게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

난 이 편지를 발견한 다음날 고민 끝에 종암경찰서에 살인사건 신고접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담당한 종암경찰서 강력계 형사1부 수사관 김종태씨는 서울 경찰청 과학수사대 권정태 경위에게 이 노트를 보내 K라 지칭하는 이의 프로파일링을 부탁했다. 그로부터 한달 여가 지난 12월 초 권경태 경위에게 받은 답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건 번호 KJ200911091252

(중략) 민원인께서 의뢰한 본 사건 자료 판독 결과 실제 살인범이라 주장하는 K의 경우 본 노트가 뚜렷한 살인 목적이나 살인을 진행했다는 증거자료로서 불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연쇄살인범일 가능성일 가능성보다 살인을 진행하기 위한 참고자료의 성격이 강하다고 판명됨. 다만 여기서 드러나는 K의 성별은 남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대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취득했을 것이라고 예상.

(중략)

최근 유영철과 강호순과 같은 연쇄 살인범들에게 보이는 싸이코패스적인 징후보다는 그 진행단계로서의 편집형 정신분열증에 가깝다고 판단되며 민원인이 보내준 자료의 내용을 분석한 바 실제 K의 언어성이 깨져 있는 단계까지 진화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됨. K의 나이는 30대 초중반으로 예상되며 이러한 정신분열은 20대 중후반부터 악화되었을 것이라는 게 본 수사관의 소견임

체격은 왜소할 것이며 부모와 결별했거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 학대 받았을 가능성이 높음. 이성관계는 없을 것이며 성적으로 무감각하거나 무정자증같은 성적으로 왜곡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음. 본 자료에서 나타나는 K의 심리상태는 과도한 방어기제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타인을 향한 공격성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있음

경찰청으로부터 이와 같은 답변을 받은 이후 나는 김경태 수사관과 함께 이 K란 인물이 남긴 자료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다. 우선 본인의 필체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이 책에 적혀진 모든 글씨는 아날로그 타자기로 재 타이핑되었다는 점, 그리고 80년대 이후부터 2009년 용산까지 한국의 정치 사회적 이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사건 자료들을 수집/정리해왔다는 것이 특이할 만한 점이다.

그러나 이 K란 인물을 분석하며 내가 느꼈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자신을 살인범이라 주장하지만 이는 정황상 심증일 뿐 확증적 증거가 부재했고 오히려 편집증적인 태도로 유사 범죄사건 자료들만을 수집해왔던 그 욕망의 불일치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난 이 K란 인물이 연쇄살인범임을 스스로 주장하지만 실제 연쇄살인범일 가능성보다 그들을 동경하거나 스스로 환상을 만들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과대망상에 가깝다고 결론지었다

90년대 보안사 민간인 사찰 카드와 용산참사, 일가족을 강간하고 자살을 시도했던 40대 가장, 강남에서 살고 싶어서 부모를 죽여 보험금을 타내려 한 10대 청소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언제나 가진 자들의 편에서 사회정의를 외쳤던 권력의 모습들, 왕따를 당해 자살을 한 초등학생의 유서부터 자신의 정사를 기록한 사진들까지 그가 수집한 이 노트 속에는 다층적이고 정리되어 있지 않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수많은 결들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적었던 이 모든 기록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자신만의 환상으로 재해석한 광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론 이것이 단순 개인 차원의 환상이 아닌 실제 우리가 그 동안 욕망했던 공공의 환상들이자 그로 인해 묵인해왔던 남겨진 여죄의 기록들이다.

지난 시간, 그의 노트를 정리하며 문득 K와 나는 한 몸에서 태어난 샴쌍둥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폭력과 상식이 무너진 이 세계에서 그와 나는 같은 것을 바라보며 다른 것을 느꼈고 언제나 다른 곳을 바라보며 동시에 같은 곳을 꿈꿨다. 더불어 이 시대의 역사는 소통이 아닌 불화를 통해 증명해 왔음을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