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을 본다면.

만약 국내의 어떤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면 다른 다큐멘터리와 함께 묶어서 상영하기 곤란한 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들 각각을 가상의 공간에 점으로 표시한다면, 그리고 닮은 영화들끼리 가까운 위치에 표시한다면, 이 영화는 많은 다른 다큐멘터리들이 밀집해 있는 장소에서 동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독립 다큐멘터리라는 영역에서 기존의 다큐멘터리 영화들과 다른 길을 가는 영화는 찾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시도들이 그다지 반갑게 환영받는 것도 아닌 듯 싶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을 본다면 어떤 유쾌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앵글, 그리고 적정노출이나 화이트밸런스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이지만 백악관이라는 상호를 사용하고 있는 가게들을 찾아가 그 곳 주인들에게 어떻게 그런 간판을 내걸게 되었는지를 묻는 단순한 시도로 한국 사람들의 어떤 인식을 의미 있게 보여주고 있다. "NEVERSEE PRODUCTION"이라고 내걸린 시작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경쾌함이 짐짓 무거운 태도를 취하고 있는 여타의 다큐멘터리들과 다르다고 해서 이 시도가 다른 다큐멘터리보다 가볍다고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경중을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뿐더라 적어도 이 영화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은 다큐멘터리가 보이는 것을 기록한다는 통념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려고 하는 시도야 말로 차라리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기대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건 사안 혹은 쟁점의 현장에서 그것을 정당하게 보여주는 것 "객관적"이라는 명목으로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고 어쩌면 유일하게 생각되었을 수도 있는 독립 다큐멘터리의 어떤 사명감은 사실은 방송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다. 하지만 어떤 방송도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공영방송이건 민영방송이건, 모든 방송사는 사실 하나의 회사에 불과하고 회사인 이상 어떤 힘의 질서에 쉽게 영향 받을 것이며, 기꺼이 그 질서에 동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에서 FTA가 체결되어선 안되는 이유를 말한다고 한들, 9시 뉴스데스크에서는 "반FTA 집회가 폭력시휘로 변할 가능성"을 말하는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현실"이 이렇다 보니. 독립 다큐멘터리에서는 방송이 해내어야 했던 역할에만 주로 집중되어왔고 그것이 거의 전부다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 FTA의 문제점을 말하는 것처럼 방송에서도 사안을 다루기 시작하게 되자, 독립 다큐멘터리가 더이상 필요없지 않을까라는 불필요한 회의론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 불필요한 회의를 사실은 PD수첩을 이끌어낸 게 독립다큐멘터리의 힘이었다는 식으로 다독거리는 것 역시 불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문제의 근원은 독립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생각하는 곳에,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자기가 만드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있어왔다. 항상 실험과 "진보"를 나누고, 내용과 형식을 둘로 나눠 생각함으로써 다큐멘터리가 지니고 있는 영화의 가능성을 포기하거나 후퇴시켰다라고 하는게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추려 말하자면 그 동안 독립다큐멘터리가 재미없었던 이유를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모든 독립 다큐멘터리를 싸잡아 이야기하지 말라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해서 덧붙이자면, 간간이 흥미로운 독립 다큐멘터리들이 등장해서 그나마 반가웠다고 말하겠다)

예를 들자면, 파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이제 제주도에도 영어마을을 만들겠다고 하는, 영어를 지극히 사랑하는 한국의 현상을 많은 영어학원들과 조기 영어교육의 현장을 촬영해 보여주겠다는 것은 아주 재미없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다들 알고 있는 것의 반복이자 신문기사의 나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은 그런 식으로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다만 사람들에게 질문할 뿐이고 그걸 통해서 현상과 이면의 인식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점이 영화를 눈여겨보게 한다.

영화에서 어른들은 백악관이 미국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란 질문에 뉴욕인가..라며 말을 흐리기도 하고 또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은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는 얘기를 꺼내 놓기도 한다. '워싱턴 호프'에서는 친구와의 전화통화때 장난삼아 아마 약간의 과시욕도 담아서 "여기 뉴욕 워싱톤!!"이라고 소리치기도 했다는 사람도 있으며 손님을 왕처럼 모시겠다는 '고속도로 휴게소 클린턴'도 있다. '한국적'이란는 말에서 보통 오해가 많지만 <취화선>이나 <춘향전>보다 더 한국적인 것은 청와대보다 백악관이라는 상호가 훨씬 많고 청와대가 백악관보다 격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바도 이런 현상일 것이다.

물론 영화속에 나왔던 인터뷰대로 청와대건 백악관이건 그게 무슨 격이 있겠는가 지금에 와선 시설 좋은 '백악관 예식장'보다는 좀 후지더라도 어감 때문에 그 옆의 '노제리노 예식장'을 선택하게 되는 게 한국의 한국적인 현상인 것을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는 의외로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적인 현상이야 마로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주제일 수 밖에 없지않을까. 영화에서 연출자는 청와대 견학을 가서 그 곳 안내원에게 청와대라는 이름이 BLUE HOUSE인 이유가 WHITE HOUSE를 모방했기 때문인가를 묻는데 돌아오는 대담은 다음과 같았던 것이다. "정해진 질문외에는 보안상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후반부에서 영화는 의 "We Need Protection"의 가사를 직접 인용한다. 그것도 다른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은 채 음악과 함께 그냥 그 가사만 통채로 보여준다. 자못 의미심장한 이 가사에 아니아니 너무 의미심장한 이 가사에 후렴구 처럼 반복되는 구절은 아이러니하게도 "I Don't Know"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현상을 보여주면서도 나비를 채집하듯 고정된 어떤 의미에 핀으로 못 박고 싶지않다는 태도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 영어 가사는 한국적인 현상의 목소리를 그 어떤 한국어 가사보다도 직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것 참 아이러니 하게도.

이 쯤되면 읽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궁금할 수도 있고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곘다. 그러나 아마 이런저런 이유로 실험영화제를 제외한 다른 영화제에서 거절 당한 것을 보면 다시 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덕분에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마음놓고 영화내용에 대한 말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되풀이 얘기하는 바, 한국적인 현상을 짚어보는 이런 종류의 경쾌함 내지는 유쾌함을 독립 다큐멘터리라는 영역에서 좀 더 자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램이랄까. 뿐만 아니라 사실 이런쪽이 내가 독립다큐멘터리에서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김경만/독립영화감독, 인디다큐페스티벌2006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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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에 백인을 보면 전부 '미국 사람'으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지난 세기 우리에게 미국에 대한 사대사상은 미국을 전 서구인들의 대표 격으로 승격시켰고 헐리우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백악관은 말 그대로 자유와 평화, 품격과 권력의 결정체였다. 정윤석의 다큐멘터리 영상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통해 한국 사회에 아직도 만연한 기성세대의 후기 식민주의적 의식을 희화화하고 있으며 또한 미국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들의 달라진 의식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부쉬의 가면을 쓴 인물이 한국에 있는 백악관을 찾아다는데 그곳은 백악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호프집. 중국음식점. 부동산 PC방, 예식장등으로 소위 말하는 한국의 전형적인 B급 문화를 형성한 곳들이다. 그의 인터뷰 대상들 - 한국에서 '백악관'이라는 상호를 사용하는 업소의 주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질문 "이 이름이 마음에 드세요?"에서 유발하는 다소 엉뚱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어내는 답변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이슈들을 건드리며 포스트 식민사회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정체성의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백악관'에 이어 작가는 우리나라의 '청와대'를 간판으로 하는 노래방,칼국수 집 주인들을 인터뷰하며 한국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지역차별, 부패한 정치권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뿌리깊은 한미관계의 사대정신을 고발한다. 중요한 점은 그가 이 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 키치적이고 익살스러운 블랙 유머를 통쾌함으로써 세계 권력의 중심인 백악관과 근엄한 청와대의 정치적 무게감을 한낱 웃음거리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실제 청와대 홈페이지에 표기된 BLUE HOUSE라는 명칭을 없에는 과정에 동기를 부여하는등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윤석과 같은 젊은 세대에게 더이상 고귀한 백악관과 존엄한 청와대란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조주현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There was a time when every white man with blue eyes was called ‘American.’ The toadying attitude to America in the last century made America as a representative of the West, and the White House in Hollywood movies were literally a prime symbol of liberty and peace, and dignity and power. Jung Yoon-suk’s documentary video work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caricatures a still prevalent post colonial consciousness of the older generations in Korea and presents a different structure of consciousness of the younger generations through a kind of performance. In the video, a person wearing a mask of Mr. Bush’s face looks for White Houses in Korea. The White Houses are pubs, Chinese restaurants, PC Bangs (Korean term for LAN Gaming Center) and wedding halls that have ‘sign boards’ saying White House, and they are places where what is called a typical Korean B-grade culture is formed. Unexpected and absurd answers of the same question for his interviewees-the owners of various shops that use ‘White House’ as their name in Korea, “Do you like this name?,” provoke many issues in Korean society and express the loss of historical identity in post colonial society. Following his search of ‘White House,’ the artist interviews owners of Noraebangs (Korean term for Karaoke, or Singing Room) and noodle restaurants, and accuses a deep-rooted toadyism in the Korea-US relationship as well as raises questions about regional discrimination and corrupt politics pervasive in Korean society. The important point is that he does not remain merely degrading political gravity of stern Blue House and White House as the center of world power, and practices his will by his action such as removing letters BLUE HOUSE from the website of the Blue House. It suggest that the noble White House and the dignified Blue House do not exist for members of the young generations like Jung Yoon-suk.

Cho Ju-hyun (Curator, Seoul Museum of Art)


역사를 통틀어 통치자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항상 회화와 조상들을 이용해왔다.

-기사 조쿠르(Chevalier de Jaucourt, 1704-1780)

TV 드라마와 뉴스 화면에 풀샷(full shot)으로 등장하는 건물의 외경은 장차 그 안에서 일어나게 될 일의 서막이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위풍당당한 정면이 보인다면 그건 아마 한국과 미국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윤석의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은 너무나 잘 알려진 듯하지만 사실 제대로 알려진 것은 없는 어느 ‘집’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외경은 멀쩡한데 어째 우리가 보아왔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과는 다른 곳. 그의 카메라는 ‘국가 원수의 관저’가 아닌 거리의 하우스들, 즉 백악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나이트클럽ㆍ중국음식점ㆍ부동산ㆍ노래방 등을 찾아간다. 그래서 그곳은 유일무이한 정치적 풍경 대신 ‘짬뽕, 뒤죽박죽, 지글지글’이 어울리는 대한민국 도시의 후미진 골목길 어디쯤 엔가로 둔갑한다.

한 국에서 ‘백악관’이라는 상호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첫 화면에서 부시의 가면을 쓴 남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퍼포먼스의 성격을 드러낸다. 화면에는 왜 백악관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지, 매출에는 이득이 되는지 구체적 정황을 묻는 대화가 오간다. 하지만 그것은 번쩍이는 은빛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부시의 '얇은 종이 얼굴' 가면을 통해 이미 백악관 안주인의 조야함을 들춰낸 이후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의 리얼리티는 백악관-부시의 가면-나이트 삐끼를 연상시키는 B급 문화의 시각적 외피에 영향 받는다. 그렇다고 백악관과 청와대, 그 둘 사이의 유비에서 식민주의적 양가성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 공간이 키치적 풍경이 되어버린 웃지 못 할 현실의 비판적 제스처만으로도 부족하다. 왜냐하면 수많은 백악관 안주인들의 속 이야기를 우리는 들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 야 여기 뉴욕 워싱턴! 그러면서 놀리는 거야, 뭔가 좀 웅장하게 큰 규모로 한다면 자부심이 있겠지만 협소하게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 백악관을 상호로 한 주인들의 인터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자괴감, 하지만 낯 두꺼운 낙천성이다. 소득수준이 높은 고객을 끌기 위해 백악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뭔가 '있어 보이니까' 간판을 내걸었지만 이들은 그 유인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정윤석이 만난 '중국집' 백악관, '나이트클럽' 백악관은 고객의 기대치를 자극해 보고자 스스로의 이름을 지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지칭이 너무도 자명한 고유명사 백.악.관 앞에 오히려 설득력을 갖는 것은 "어떻게 하다보니까 하게 된 거지" 라는 어느 주인의 고백이다.

' 미국의 권력 중심부' 백악관을 기표로 모방한 가게 주인들에 이어 작가는 또 다른 모방의 축을 끄집어낸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청와대를 간판으로 하는 노래방, 칼국수 집 주인들을 통해 청와대와 백악관의 '관계'를 희화화하는 것이다. 정윤석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갈망하듯 반복하는 것 사이에서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의 시각적 이미지를 헷갈려 하는 한 사람을 등장시킨다. 스펀지로 백악관을 만들어보는 남자와 작가 사이의 대화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부시 가면에 이은 또 다른 퍼포먼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징적 권력을 생산해내는 뉴스 화면의 삽입과 작가가 하나의 어설픈 쇼처럼 등장시킨 '스펀지 백악관'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의 정치적 무게감을 격하시킨다.

그 러나 사실 정윤석과 같은 젊은 세대에게, 애초 근엄한 청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살고 있는 정치적 공간은 고정된 권력의 성(城)이 아니라 언제든 '진실의 효과'로 흔들리는 연막의 장이 쳐진 곳이다. 정치적 위엄이란 미디어에 의해 언제든 <돌발영상>으로 인해 소프트해질 준비가 되어있고 자본의 유인은 '우리나라'의 전통(!)을 이용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윤보선 대통령이 백악관과 비슷(대등)해 청와대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라는 청와대 미스터리는 모방과 대등 사이에 존재하는 착각, 정체성의 환상을 떠올리게 한다.

작 가가 백악관과 청와대 상호의 중년 주인들에게 물었던 "이 이름이 마음에 드세요?" 라는 질문은 지금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건드리는 것이다. 작가의 친구는 '백악관웨딩홀이 아닌 노제리노에서' 격(dignity) 있게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며, 부시의 눈 먼 가면을 쓰고 엉거주춤 백악관 나이트를 향하는 한 남자의 걸음걸이로 영상은 끝난다.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에 나타난 관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사 다큐멘터리 형식의 차용은 '휴게소 클린턴'이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뜬금없음'에 눈 밝히며 저 너머의 ‘다른’ 것들과 '나'의 권력을 이야기하는 데 유효해 보인다.

글_현시원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Throughout history, the rulers have always used paintings and sculptures to rouse positive emotions from the ruled

Chevalier de Jaucourt, 1704-1780

The exterior of a building on TV dramas and news is a prelude of what will happen in the inside of it. If we see magnificent front sides of the Blue House and White House, then it may suggest that we will see a story about Korea and US. Jung Yoon-suk’s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is a documentary about ‘houses’ that seem to be known so well but not actually known instead. Places somewhat different from what we thought we saw and knew from their normal looking exteriors. The artist’s camera goes not to a ‘residency of the head of state’ but to other ‘houses’ on street, that is, nightclubs, Chinese restaurants, real estate agencies and that bear ‘sign boards’ saying White House. Then those places change into somewhere in a back street in a Korean city that match expressions like ‘mixture, mishmash and sizzling’ rather than into a unique political landscape.

This documentary, which interviews people who use ‘White House’ as their shop names, reveals its nature as performance when a man wearing mask of Mr. Bush’s face in the first scene. There are conversations asking detailed circumstances about why they use the word White House and does it profit their businesses. But that is after a man wearing silver colored suit revealed coarseness of the host of the White House through a ‘thin paper face’ of Mr. Bush. In that sense the reality of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is influenced by a visual look of B-grade culture that reminds the White House-Mr. Bush’s mask-night club touts. Reading a colonial ambivalence in the analogy between the White House and the Blue House is not enough, though. A critical gesture against the unlaughable reality where political sphere became a kitsch landscape is also not sufficient, because we have to listen inner stories of the hosts of the very many White Houses.

“Hey here is New York Washington! So people tease (this name). I will have some confidence if I’m doing it some magnificent and big, but I don’t like it being a small place.” What is notable in the interviews with the White House owners is a sense of shame, at the same time a thick-skinned optimism. They know their attempt is not that successful, although they use the name White House to attract customers with higher income level and they put the sign board since it ‘looks like something important.’ The owners of White House ‘Chinese restaurant’ and White House ‘night club’ interviewed by Jung Yoon-suk say that they used the name to expectations of their customers. But what is compelling in front of an obvious word W.H.I.T.E H.O.U.S.E is rather a confession of an owner, “I just happened to use it.”

Following the shop owners who mimicked the White House ‘the power center of America’ as a signifier, the artist brings another axis of mimicry. That is to caricatu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lue House and the White House through the owners of Noraebangs (Singing Room, a Korean term for Karaoke) and noodle restaurants with their sign board that bear Blue House of ‘our country.’ Jung Yoon-suk presents a person confused with the visual images of the White House and the Korean Parliament building, standing in-between something he already knows and something that repeats itself. A conversation between a man making the White House with sponge and the artist reminds a fake documentary, and it can be seen as another performance followed by the performance of Mr. Bush’s face mask. Inserts of news clips, which produce symbolic power, and a ‘sponge White House’ presented like a sloppy show by the artist degrade political gravity of the White House and the Korean Parliament building.

But in fact, to a member of young generation like Jung Yoon-suk, a stern Blue House does not exist from the first place. A political space where the president lives is not a fixed fortress of power but a smoke screened place that can be shaken at any time by ‘the effect of truth.’ Political dignity is ready to become soft at any time by media and programs like Dolbalyoungsang (a famous Korean TV program shows political tidbits), and tempting the capital seems impossible by using a tradition(!) of ‘our country.’ The mystery of Blue House that one of the former presidents, Yoon Bo-seon, liked the name Blue House since it is similar (equal) to the White House recalls an illusion existing between imitation and equality, a fantasy of identity.

The question the artist poses to middle aged shop owners, “Do you like this name?” is a question that provokes so many problems in the current society. Jung Yoon-suk’s work ends with his friend’s mention that he will have a marriage ceremony with dignity ‘in Nogelino wedding hall, not in a White House wedding hall’ and a footage showing a man wearing a mask of blind Mr. Bush stooping toward a White House night club. The curiosity in relationship and appropriation of documentary form shown in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appear to be effective in telling powers of ‘me’ and of ‘others’ that are beyond, enlightening the ‘out-of-nowhereness’ of Korea where there exist ‘roadside shop Clintons.’

Written by Hyun Si-won

‘이름’이 세상을 관통하는 방식에 관한 하나의 지점, <우리나라에도 백악관>

정윤석의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은 ‘이름’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이 작품은 특정 명칭을 가진 ‘간판’ 비주얼과 연상되는 이미지에 대한 통계가 ‘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호기심어린 접근 태도로 이루어져 있다. 무심히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그가 보기에) 이 이상한 이름의 (백악관)간판. 이것은 왜 그렇게 눈에 띄는 곳에, 시선을 끌게끔 배치되어 있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가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시각적 공해라 할 만큼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간판들’이 좀처럼 감각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끔 우리에게 독특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면 ‘재밌다’는 표현과 함께 디지털 카메라나 핸드폰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두는 정도이거나, 직접 그 가게에 들어가 보는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같은 명칭의 간판을 가진 곳들 중에서 감독이 포착한 지점은 ‘백악관’과 ‘청와대’라는 이름이다.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은 왜 감독이 ‘백악관’에 주목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앞서, “이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최근 ebs국제다큐페스티벌에서 상영된<그레이스 리 프로젝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혈액형> 두 다큐멘터리는 각각 교포 2세대에게 ‘그레이스 리’ 와 ‘빅토르 최’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에 대해 탐구하고,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의 공통된 특징을 조사하거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다룬다. 무엇보다도 이들 영화가 사람의 이름에 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우리나라에도 백악관>과 주목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왜 그 ‘이름’이 그렇게 호명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두 개의 나라가 문화적 혹은 삶의 방식으로서 어떤 식으로 충돌하고 있는가가 그것이다.

언급한 두 다큐가 한국에 뿌리를 둔 존재에 대한 이름을 미국과 러시아에서 바라보고 있는 작품이라면, 정윤석의 다큐는 우리가 미국을 상징하는 어떤‘이름’을 수용하는 방식에 관해 한국에서 탐구한 작품이다. 그런 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은 굉장히 흥미로운 문제를 간파하고 있다. 사실, ‘백악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음식점, 노래방, 호프 등은 어떠한 명백한 의도로서 그런 간판을 만들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만 ‘백악관’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있어보이’거나 ‘청와대’보다는 격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종사 업종 사장들의 말은 오히려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백악관’ 이어 ‘그렇다면 청와대는?’으로 옮겨간다. ‘백악관’이라는 상호를 가진 간판 수보다 현저하게 낮은 수치를 가지고 있는 ‘청와대’간판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붙인 이름은 아니라는 마찬가지 대답을 들을 수 있다. 미국의 대통령이 살고 있는 백악관과 한국의 대통령이 살고 있는 청와대가 한국에서 명칭으로서 위치하고 있는 것은 ‘이미지적으로’ 굳혀진 하나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한국적으로’ 통용되고 소비되는 개별국가 사이의 명칭에 대한 틈새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간격으로서 메워지고 있는데, 그것은 우월감과 열등감의 표식에 관한 발생적 논리의 한 순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간판의 홍수 속에서 한국 서비스업의 생산전략은 ‘눈에 띄는’ 이름에 기대어 — 한국 전쟁 후 가속된 미제품의 신뢰처럼 — 소비자뿐만 아니라 생산자까지 우월성에 대한 환상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에서 말하는 뿌리깊이 잠식되어버린 ‘이름’ 혹은 ‘명칭’에 대한 소비는 문화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강함’과 ‘높은 주체’에 관한 모순된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우월한 존재감을 위시한 ‘이름’을 소유하는 욕망과 그것을 서비스의 머리말로 장식하려는 소비논리의 방식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백악관?’ 혹은 ‘우리나라의 청와대’가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백악관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세태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글_ 김다현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a Point about How ‘Name’ Penetrates the World

Kim Da-hyun

Jung Yoon-suk’s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is a documentary about ‘name.’ This work is composed of an approach full of curiosity on ‘why’ and ‘how’ statistics about ‘sign boards’ that have a specific name and their associated image are constructed. Sign boards with a strange name (White House) that (the artist thinks they) can be casually ignored by people. Why are they placed in very noticeable spots to attract people’s attention?

The reason for us to watch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may rather be that increasing number of sign boards’ enough to be called as visual pollution are not so often look fashionable. If we see some unique sign boards, our response would be taking photographs of them, saying ‘it’s interesting,’ or go into shops by ourselves. Yet among so many sign boards with same names, the point which the artist captured is two names, ‘White House’ and ‘Blue House.’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brings up thoughts on “what does name means to us” before a question about why he focuses on the ‘White House.’ The two recently screened documentaries, Grace Lee Project (2005) at EBS International Documentary Festival and Blood Type (2005) at 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inquire the reason behind how the two second generation overseas Koreans are named ‘Grace Lee’ and ‘Victor Choi’ and examine the commonness among people with the same names, or deal with how their lives are constructed. Above all, they have two noticeable points in common with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though they are documentaries about people’s names above all. Why the ‘name’ is called by its name and how two countries collide culturally or as different ways of life.

While the two afore mentioned documentaries view names about beings originated from Korea in America and Russia, Jung Yoon-suk’s documentary investigates the way Koreans receive a certain ‘name’ that represents America. In this point of view,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reads a very interesting issue. It is a conclusion that various shops with the name ‘White House’ did not have clear intention when they put the name on their sign boards. It is merely because the name ‘White House’ simply ‘seems to have something’ or it is more classy then ‘Blue House.’ Shop owners’ comments that the naming does not help their businesses, but instead makes them inefficient are meaning rather meaningful. Then it moves its eyes to a question ‘what about the Blue House?’ from ‘White House.’ We hear that ‘Blue House,’ which has remarkably less number of shops with the name, is not a name made up with a special meaning, too. The fact that the White House and the Blue House, where the presidents of two countries resides in, are positioned as a name used for sign boards in Korea is merely a stereotype ‘imageably’ fixed.

In that sense, the gap between titles of countries used and consumed ‘Koreanly’ is filled with the gap between producers and consumers, and it can be viewed as a moment of genetic logic about an indication of superiority and inferiority. In a flood of sign boards, the production strategy of Korean service industry is depending upon ‘distinguished’ names-as the accelerated reliance upon American products after the Korean War-and consumed as a fantasy of superiority by producers as well as its consumers.

Thus the deeply established consumption of ‘name’ or ‘title’ shown in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reveals an ironical way of thinking about ‘powerfulness’ and ‘higher subject’ prevalent in cultural awareness. This work, which shows a desire of possessing a ‘name’ that arouses superiority and a mode of consumerist logic which tries to use it as its title, is pointing out a social condition that inevitably gives rise to a reaction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instead of ‘the White House in my country?’ or ‘the Blue House of my country.’